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주만 공습 (문단 편집) === 미국의 분노 === || [youtube(lK8gYGg0dkE)] || || 공습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미 국회의사당에서 진행된 미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대일 선전포고 요청 연설. 일명 '''"치욕의 날 연설(The Day of infamy Speech)"'''이라 불린다. 루스벨트가 의회에 전쟁 선포를 요청하며 연설을 끝맺자 의원들이 전부 기립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연설은 미국의 프로파간다와 선전 포스터에도 사용되었다.] || >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 어제, 1941년 12월 7일 — 치욕의 날로 기억될 날에 — 미합중국은 일본제국의 해군과 항공대에 의해 고의적이며 기습적인 공격을 당했습니다. >----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12월 8일 대일선전포고성명을 내면서 의회에서 한 연설의 첫 부분. 흔히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부른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s-2.3|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항목 참조. 참고로 이 부분은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인트로 영상에도 나온다. [[https://youtu.be/YhtuMrMVJDk|유튜브 자동재생]] > {{{#!folding 치욕의 날 연설문 전문 [펼치기 • 접기] Yesterday, December 7, 1941, 어제, 1941년 12월 7일,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치욕의 날로 기억될 이 날에,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미합중국은 일본제국의 해군과 항공대에게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The United States was at peace with that nation, 미국은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and, at the solicitation of Japan, 일본의 요청에 의하여, was still in conversation with its government and its Emperor looking toward the maintenance of peace in the Pacific. 일본 정부, [[쇼와 덴노|일본 천황]]과 [[태평양]]의 평화 유지를 위한 담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Indeed, one hour after Japanese air squadrons had commenced bombing in the American island of Oahu, 사실대로 말하자면, 일본 항공대가 오아후 섬에 폭격을 개시한 지 한 시간이나 지나고서야, The Japanese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and his colleague delivered to our Secretary of State a formal reply to a recent American message. 주미 일본 대사는 최근 미국이 보낸 서한에 대해 우리의 국무부 장관에게 의례적인 답변을 보냈습니다. And, while this reply stated that it seemed useless to continue the existing diplomatic negotiations, 그리고, 이는 [[단교|양국간 외교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내용]]이였지만, it contained no threat or hint of war or of armed attack. 전쟁이나 무력 사용에 대한 위협과 암시는 일절 없었습니다. It will be recorded that the distance of Hawaii from Japan makes it obvious that the attack was deliberately planned many days or even weeks ago. 일본에서부터 하와이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본다면, 이 공격은 몇 일, 혹은 몇 주 전부터 신중히 계획된 것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During the intervening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has deliberately sought to deceive the United States by false statements and expressions of hope for continued peace. 양국 간의 화해 상태 동안 일본 정부는 [[화전양면전술|평화 지속에 대한 거짓된 성명과 표현으로 미국을 기만하려]] 치밀한 노력을 했습니다. The attack yesterday on the Hawaiian Islands has caused severe damage to American naval and military forces. 어제 일어난 하와이 제도를 향한 공격은 미 해군과 미 육군에 심각한 손실을 일으켰습니다. I regret to tell you that very many American lives have been lost. 저는 여러분들께 유감스럽게도 많은 미국인들이 숨을 거뒀다는 것을 알립니다. In addition, American ships have been reported torpedoed on the high seas between San Francisco and Honolulu. 더불어,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사이의 공해 상에서 미국 군함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습니다. Yesterday the Japanese Government also lauunched an attack against Malaya. 일본 정부는 어제 말라야에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Hong Kong. 일본군은 어젯밤 [[홍콩]]을 공격했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Guam. 일본군은 어젯밤 [[괌]]을 공격했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the Philippine Islands. 일본군은 어젯밤 [[필리핀|필리핀 제도]]를 공격했습니다. Last night the Japanese attacked Wake Island. 일본군은 어젯밤 웨이크 섬을 공격했습니다. And this morning, the Japanese attacked Midway Island. 그리고 오늘 아침, 일본군은 [[미드웨이섬]]을 공격했습니다. Japan has therefore undertaken a surprise offensive extending throughout the Pacific area. 그 결과, 일본은 [[대동아공영권|태평양 도처에 기습적이고 공격적인 확장]]을 시작했습니다. The facts of yesterday and today speak for themselves. 어제와 오늘의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have already formed their opinions and well understand the implications to the very life and safety of our nation. 우리 국민들은 이미 그들의 의견을 형성하였고, 이 사태가 우리 국가의 생명과 안전에 미칠 영향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As Commander-in-Chief of the Army and Navy I have directed that all measures be taken for our defense, 육군과 해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써 나는 우리를 방어할 모든 방책을 지시했습니다. that always will our whole nation remember the character of the onslaught against us. 이로 인해 우리 국가는 우리에 대한 공격의 성격을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No matter how long it may take us to overcome this premeditated invasion, 수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사전에 계획된 이 공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the American people, in their righteous might, will win through to absolute victory. 미국의 국민들은 정의의 힘으로 완전한 승리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I believe that I interpret the will of the Congress and of the people when I assert that we will not only defend ourselves to the uttermost but will make it very certain that this form of treachery shall never again endanger us. 제가 우리들이 우리 스스로를 최대한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이러한 배신이 다신 우리를 위협에 빠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전 그것이 의회와 국민의 의지를 대변했다고 확신합니다. Hostilities exist. [[제2차 세계 대전|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There is no blinking at the fact that our people, our territory and our interests are in grave danger. 우리의 국민과 영토, 이익들이 중대한 위협에 처했다는 것은 무시하지 못할 사실입니다. With confidence in our armed forces, 우리 군에 대한 확신과, with the unbounding determination of our people, 우리 국민들의 결연한 의지로, we will gain the inevitable triumph, 우리는 필연적인 승리를 얻을 것이고, so help us God. 신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I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the unprovoked and da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1941, 저는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일본의 부당하고 비겁한 공격에 대해,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의회가 [[선전포고|미국과 일본 제국 간의 전쟁 상태가 되었음을 선언]]하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파일:Remember-Pearl-Harbor-1941-US-Flag.jpg]] > 우리는 쓰러진 이들의 죽음이 결코 헛되게 하지 않을 것을 결의한다.12월 7일을 기억하라! 사건 이후 진주만 공습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발행된 포스터. 뒤의 배경은 불타는 진주만의 모습을, 찢어진 성조기는 미국이 입은 피해를, 그리고 조기로 걸린 국기는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군인들에 대한 추모를 뜻한다. 공습 직전까지만 해도 무의미한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는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이 미국 사회의 주류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루즈벨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히틀러]]가 얼마나 또라이인지 아는 사람들은 [[추축국]]과 싸워야 한다는 의견을 폈지만, 다수의 미국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20년 전 유럽의 지옥]]과 [[세계 대공황|그 지옥불에 딸려온 연옥]]을 겪어봤기에 고립주의자의 의견에 더 동조하고 있었고[* 예를 들어 미국 민간 함선들이 [[대영제국]]으로 향하다 독일 [[U보트]]에 의해 침몰해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해도 보상금 정도만 받고 끝내려 했을 정도였다. 다만 미국 정부는 유럽의 전체주의화를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무기 대여법]] 등을 통해 서유럽을 최대한 지원하고 있었다. 이때 FDR이 한 말이 미국은 '민주주의의 병기창'이 되어야 한다는 것.][* 다만 전세가 점점 격화되면서 미국인들의 생각도 점차 바뀌기 시작하는데 [[https://ibiblio.org/pha/Gallup/Gallup%201941.htm|1940-41년의 갤럽 여론조사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1940년 1월쯤이 되면 전쟁을 감수하더라도 영국을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더 우세해졌고 41년 4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약 68%가 독일을 굴복시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전쟁뿐이라면 참전을 해야 한다고 답하였다. 지금 당장 참전해야 한다는 의견은 여전히 극소수였지만 미국도 언젠가는 전쟁에 개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이고 이것이 거의 모든 국민의 전쟁 지지로 바뀐 계기가 바로 진주만 공습인 것이다.[[https://www.nationalww2museum.org/war/articles/great-debate|#]]], 미국 전통의 외교 정책인 [[먼로 독트린]]에 따라 "우리한테 직접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괜히 끼어들 필요없다"라는 주장을 강하게 내비쳤다. 그러나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에 선빵을 날리면서 미국인들에게 [[제2차 세계 대전]]은 고립주의자들이 말하던 "무의미한 전쟁"에서 __"정의를 수호하는 전쟁"__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그야말로 잠자던 거인을 '잠에서 깨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빡]]돌게 만든 셈'''. 아닌 게 아니라 공화당의 대표적 고립주의 정치인들조차 공습 소식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백악관]]으로 연락을 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일종의 충성 맹세와 함께 전쟁 수행에 대한 전면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역시 고립주의에 참전 반대파였던 한 의원은 기자들 앞에서 결연한 모습을 보이며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일본놈들을 철저하게 때려 눕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진주만 공습으로 미 정계의 고립주의 계열은 사실상 소멸, 와해되었다. 즉 이 시점에서 이미, 전쟁의 끝을 보기 위해서는 진주만에서 당한 이상으로 일본 본토를 공격해 일본군과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밖에 없었다. [[도쿄 대공습]]이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같은 대규모 민간인 피해나 [[미군의 일본군 전사자 사체 훼손|일부 장병들의 시체 훼손 행위]] 따위는 "Remember Pearl Harbor!" 앞에 무용지물이었다.[* 그리고 이 대원칙은 60년 뒤 반복되어 간 크게도 진짜 미국 본토의 심장부인 [[911 테러|뉴욕의 마천루를]] [[오사마 빈 라덴|공격한 자]]를 미국은 정권이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뀜에도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면서 [[넵튠 스피어 작전|결국 사살했고]], 이를 방해한 [[탈레반]]이나 9.11 테러를 신의 심판이라며 조롱하며 깝쳤던 [[사담 후세인]]등도 세트로 같이 삭제되었다.] 공습 다음 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연설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 '전쟁 참가법'이 상원에서 [[만장일치]], 하원에서 388:1로 가결되며 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한다. 그리고 분노한 미국 국민들의 입대 러쉬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자진 입대율은 90%에 이르렀다는 말도 있는데, 특히 공수부대나 해병대 같은 일부 월급도 높은 특수전투병과는 지원율이 100%를 넘기며 경쟁적으로 입대했다고 한다.[* 이렇게 자진 입대율이 높다는 점을 악용해 [[군대]]를 빠진 사람들도 상당했다.] 심지어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입대불가 판정을 받은 청년이 낙담한 나머지 [[자살]]한 사건까지 있었다고 한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참전 용사 인터뷰 장면에서 이 얘기가 언급된다.] 자원입대한 사람들 중에는 [[배우]]나 운동선수 같은 유명인사들도 많았는데, [[조 디마지오]]처럼 위문공연을 다녔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폭격기 승무원이였던 [[클라크 게이블]], [[제임스 스튜어트]][* 폭격기 승무원으로 전후 [[준장]]까지 진급했다.]나 해군 대공포 사수 [[밥 펠러]]처럼 최전선에서 복무했다. 심지어 [[국회의원]] 중에서도 몇 명이서 항해국[* 당시 미 해군의 인사사령부 역할도 맡는 부서였다.]장이던 니미츠 [[제독]]을 찾아와 해군에 입대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니미츠 제독은 "해군을 위한다면 입대 대신 의사당으로 돌아가 우리를 위한 예산을 배정해 달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다만 일부 국회의원들은 진짜 참전했는데[* 주 단위에선 주지사 외에 그 휘하, 의회의 정치인이나 공무원들, 그 외에 소도시의 시장들, 각 지역의 중견 명사들(전문직 종사자)이 전쟁 전부터 주 방위군 장교/장성으로 복무했던 경우가 많았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 내내 풀타임으로 참전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린든 B. 존슨]].[* 전쟁 이전에 하원의원 재직 중에 해군소령으로 복무했는데 진주만 공습이 터졌고 주로 감독관으로 활동했다.] 고위정치가들의 아들들도 줄줄이 입대했는데, 대표적으론 '''[[존 F. 케네디]]'''가 있다. 다만 이쪽은 전후에 참전 경력이 유력할 수 있다고 계획적으로 입대한 것이긴 하다. 어뢰정이 격침돼서 죽다 살아나긴 했지만. [[캡틴 아메리카]]가 괜히 군대에 가고 싶다고 그 난리를 친 것이 아니다. 반면 독일,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같은 백인인 것도 있지만 직접 맞은 것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반감이 덜했다. 전쟁 참가법 표결에서 유일한 반대표는 공화당의 지넷 P. 랜킨([[http://history.house.gov/People/Listing/R/RANKIN,-Jeannette-%28R000055%29/|Jeannette P. Rankin]]) 의원이 던졌다. 미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자 [[반전주의]]자였던 랜킨은 이전 임기인 1917년 때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표를 던졌던 4명 중 하나였다. 1940년에도 이전 임기처럼 랜킨은 "여성이기 때문에 저는 전쟁에 나갈 수 없습니다. 허나 남자들을[* 원문은 "다른 사람(anyone else)"이지만, 당시 군대에 입대하는 사람은 남자밖에 없었으므로 사실상 의미하는 바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전쟁터에 보내는 것도 반대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전쟁에 찬성하는 표를 던질 수는 없습니다"는 말로 반대표를 던졌는데, 이때는 [[치머만 전보|국민적인 분노]]가 1차 세계대전에 비해 훨씬 컸던 상황이라[* 1차 대전 당시에는 단순히 "미국을 치자"라는 비밀 전보가 흘러들어와 배신감에 괘씸해서 참전했다면 진주만 공습에는 미국이 직접 공격당하여 피해가 발생한 것에 분노하여 참전한 것이다.] 생명이 위험할 정도라서 신변보호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민주주의란 만장일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정치제도'''"라며 맞섰고[* [[불편한 진실]]에서도 만장일치라는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 역사가 이를 증명했다. 이것으로 인해서 독재가 발생했고 수많은 불의가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일어났다. 하지만 자국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대통령 중심제]]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부터 만장일치로 당선된 인물이라는 명백한 반례도 존재한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시기에도 반전운동을 이끌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 전 국민의 분노는 랜킨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혼자 반대표를 던진 탓에 미국인들의 분노가 그대로 집중되어 매일 수많은 사람들과 언론들이 사무실로 전화를 걸거나 찾아왔고 엄청난 반박과 위협들이 쏟아졌으며, 해당 공습으로 아들을 잃은 수많은 부모들의 전화와 랜킨에게 실망했다는 가족, 친구, 친척들의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랜킨은 결국 이에 굴복하여 이틀 후 하원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차례로 선전포고를 할 때는 찬성에 투표를 던졌으나 이미 때는 늦었으며 이로 인해 그녀의 의원 생활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다만 훗날엔 이런 의미 있는 반대도 기려져 사후 미국 국회의사당 입구에 [[http://www.aoc.gov/capitol-hill/national-statuary-hall-collection/jeannette-rankin|랜킨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랜킨 스스로 각오한 엄청난 자충수여서, 1942년 중간선거를 포기하고 정계 은퇴를 해야 했다. 상술한 한국전 및 베트남전 반전 운동은 정치인이 아닌 사회운동가로서 했다. 1차 대전 참전에 대한 반대투표 때는 높아진 인지도를 바탕으로 상원의원에 도전했었는데 완전히 상황이 반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랜킨의 선거구인 (공화당에게 매우 유리한) 몬태나 주 제1선거구는 랜킨이 은퇴한 1943년부터 선거구가 사라지는 1993년까지의 50년 중 '''겨우 4년''', 즉 선거로는 단 2번만 공화당이 이겼으니 당 입장에서는 밭 하나를 날려먹은 셈으로 피해가 컸다.]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 니미츠 대장으로 교체되어 일본 해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전함들이 죄다 상실된 까닭에 항공모함을 위주로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진주만에서 너무 심하게 털려버려 쓸 수 있는 전력이 빈약한 데다 항공모함조차 상실하게 될까 봐 휘하 제독들의 반대가 극심해서 니미츠 제독은 이들을 무마하고 작전을 입안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으며, 일본군의 대응도 거의 없어서 전과다운 전과는 거의 거두지 못했고 일본의 남방작전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미드웨이 해전]]까지 태평양 함대는 아무 작전도 못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한데, 사실 없지는 않았다. 일본의 호주 침공 가능성을 없앤 [[산호해 해전]]이 당시 미 해군의 대표적인 활약이었다. 하여간 이때의 충격이 무척 강렬했던 탓인지 지금도 미 해군은 항공모함 중심 편제와 함께 강력한 대공망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주만 공습 이후 미 해군은 항공모함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지만 정작 항공모함으로 진주만이라는 대성과를 거두었던 일본군은 점점 항공모함의 활용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로 대변되는 솔로몬 전역에서의 소모전을 거치면서 항공모함과 함재기들과 숙련병들이 다 수장되는 바람에...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의 분노는 일부 [[인종차별]]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났는데, 바로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로 독일, 이태리, 헝가리,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로 몰아버린 사례가 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계 미국인들이 피해를 많이 봤는데[* 다만 당시 조선인들은 미국에서도 별개로 봐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 중 진짜로 간첩 비슷하게 활동한 케이스도 있었고, 일본계 미국인 1세대는 물론 심지어 2세대들도 옛 고국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어서, 미국이 선빵을 맞은 와중에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병크짓을 하기도 했다. 물론 국적이나 사상적 문제 등으로 일본인의 삶을 잊고 미국인으로 살고 있던 이들도 있기야 했겠지만, 전쟁 와중에 온건 소수파들의 목소리는 묻히고 만다. 이런 기타 내용은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7&contents_id=66937|니하우 사건]] 문서도 참고. 한편 [[이승만]]은 1939년 11월에 집필을 시작하여 1941년 여름에 내놓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 the challenge of today)》라는 책을 통해 '조만간 일본이 미국에 도전하여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출판 직후에는 무시당했으나[* 《[[대지(소설)|대지]]》의 작가 [[펄 벅]] 등 [[아시아]]에서 오래 거주한 경험이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일제의 팽창욕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어 이런 가능성을 인정하거나 주시하기도 했으나, 일본과의 전쟁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쪽은 해군 지도부 일부 정도였고, 오랫동안 [[미국]]이나 [[일본]]이나 서로에 대해 진지하게 전쟁을 고려한 적은 없어 무시당했다.] 진주만 공격 이후 이 책은 재발굴돼 저자인 이승만 역시 미국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높이게 된다. 근데 사실 이미 1차 대전 직후부터 미국과 일본이 한 판 붙을 것이라는 예측은 난무했다.[* 대표적으로 미 해군 제독 [[어니스트 킹]]. 항목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킹은 일본이 언젠가는 미국과 한판 붙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진주만 공습 보고를 듣자 무릎을 탁 치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면서 가십거리 정도로 전락한 얘기를 1930년대 후반 들어 웬 동양인 [[듣보잡]] 망명가가 해 봐야 "[[우려먹기|또 그 소리임? 제발 그만 좀 우려먹어라!]]" 하는 반응이 나오는 게 이상할 건 없었다. 지금도 수많은 나라들의 가상 전쟁 시나리오설은 돌지만, 현실에서 실현되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니...[*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며 전쟁은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인 반발을 무릅쓰고 각오해야 할 수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